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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 언니

최근 가장 몰입해서 본 책이다. 나는 어렸을 때는 책읽기를 참으로 좋아했고, 몰입도 잘 하는 편이었던것 같은데, 해외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책과 멀어진 것 같다. 그러나 최근 리디북스의 도움으로 한국어로 된 책도 미국에서 쉽게 사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 이전에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는데, 그 책을 읽으니 진정 80년대생인 나의 이야기인것 같아 뭔가 좀 기분이 착찹하고 꿀꿀해졌다. 뭔가 거리두기가 안되었고, 그냥 '아, 그런거지 뭐.' 하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 책 '영초 언니'는 내 부모 세대의 이야기에 가깝다. 그리고 워낙 뭔가 다이나믹한 이야기들이 많고, 사건들의 진행이 빨라서 '이야기 속으로 홀라당 빠져'들게 되었다. 

몰입해서 하루만에 읽었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그렇게 읽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만큼 이 소설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이 다이나믹하고 긴장감 넘치고 생동감있게 그려져 있다. 게다가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실화라는 점은 읽는 이의 마음도 아프게 한다. 특히나 이야기 속의 화자가 관찰하고 애정을 갖고 그려낸 주인공 천영초 라는 인물과 그녀의 가족 이야기는 정말 뭐랄까 한없이 슬프고, 눈물나게 한다. 이 실존 인물에 대한 진혼곡이라고 표현할만큼, 저자가 갖고있는 애정이 깊고도 깊다. 

이 책은 아마 영화화가 되어도 그 장면들이 그려질만큼 생생하다. 

아래는 내가 밑줄친 문장. 

“유치환의 시 ‘깃발’처럼 명숙이 네가 남겨두고 간 빨래를 깨끗이 빨아서 마당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어놓고 보니 네가 너무나 보고 싶다. 네 빨래 펄럭이고 내 그리움도 펄럭이고…..”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일까? 스스로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시위를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가고 호적에 ‘빨간줄’이 그어지는 걸 감수하겠다고 각오한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꾼의 자세를 견지할 자신도 없었다. 그 어느 쪽도 내가 결심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이 문장을 읽으니, 70년대에는 어떤 식의 '편가르기'가 있었던 것 같다. 

"영원히 바뀌지 않을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이 달라지고 무너지고 무뎌진다. 정치적 입장도, 남녀 간의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하고 바스러진다. 그러나 천영초, 그녀는 내 마음속에 늘 애틋한 풀각시처럼 남아있다." -이 문장은 그 험난한 70년과 80년의 현대사를 겪은 주인공들이 결혼을 하고 90년대와 2000년대를 보내면서 변화한 것에 대한 화자의 생각이다.

<잡설> 

*미국에서 한국어로 된 책을 읽는것은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이상한 마음쫄림 같은게 있지만 그래도 재밌고 유익하다. 물론 미국에 살기 때문에 영어에 더 익숙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 한국어로 된 책을 읽고 있을때 '아, 내가 이래도 되는걸까. 모르는 단어라도 한 자 더 외워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 뭐 인생 그렇게까지 빡세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이왕 산 이 책을 다 읽게 된다. 이런 마음은 마치 기말고사를 앞둔 학생이 만화책을 보는 마음과 같을터. 그러거나말거나 나를 위로해주는 문장과 언어가 있다는 것은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