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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글 발견_내가 살던 동제 화곡동

글을 매일 한 문장씩 쓰기로 약속한 게 몇 개월 전이건만,

한 문장의 글을 써 내려간다는 것은 사실 엄청나게 힘든 일 같다.

 나는 늘 글쟁이가 되고 싶어했지만, 지금은 매월 꼬박 꼬박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들어오는 날만 손을 꼽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고 말았다. 나의 캐릭터상 생각을 하고, 뭔가를 뽑아내고 그런 '머리'로 하는 일들 예컨대, 연구원이라던가 학자라던가 그런게 '맞는'것 같지만 사실 현실과는 멀어져 버렸다. 그리고 어디 그렇게 세상이 내 맘대로 되는거였다면, 참 쉬웠을것 같다. 사는 게.

 그래도 회사원이 되어서라도, 꿈을 접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이 블로그라는 공간을 만들었는데도 아직 잘 시작을 못하고 있다. 잡다한 생각들이라도 정말 매일 매일 적다보면 (아주 조금이라도) 나중에는 뭔가가 될 수있을터인데...... 엽서만한 작은 글이라도 그 글의 주제를 생각하고, 이 글을 통해 '무엇'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것을 생각하는 일. 매일 내게는 무겁기만한 쳇바퀴를 돌려야 하는 나로서는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문장읽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 어제 퇴근길에 이 글을 보고, 아 정말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이런 종류의 글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감수성이 많은 글. 

[내 인생 마지막 편지 <35>] 내가 살던 동네 화곡동 경향신문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7242155045&code=100203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화곡동이다. 담이 없던 화곡동 마당에 혼자 앉아 털바지 안에 인형 다리를 넣어 아이처럼 업고 벽돌을 빻으며 소꿉놀이를 했다. 진짜 엄마가 되었을 땐 정작 아이를 업고 그렇게 밥하고 빨래하고 “여보, 밥 드세요” 같은 짓을 많이 하지 않았건만, 어릴 때 나는 앙큼하게도 그러고 놀았다. 담이 생기고 옆집에 정수라는 아이가 살게 되었을 때 그 아이와 난 인생의 첫 친구가 되었다. 큼지막한 미끄럼틀이 있는 길 건너의 놀이터에도 함께 다녔고 우리집 안방 장롱의 거울 앞에 서서 사진도 같이 찍었다. 어느 해 비가 많이 와서 개천이 넘쳤던 날엔 흐르는 물에 조리 한 짝을 잃어버려 울며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엄마가 시집 가 나를 낳았던 집은 갈현동이라고 했다. 시부모 돌아가신 시댁 형제들, 게다가 장가 안 든 아주버님까지 함께 사는 집이었는데, 심통이 좀 있었던 큰아버지는 내가 통통거리며 다니는 게 시끄럽다며 발끝으로 걸어다니라고 했다고 한다(다행이다, 그 서러운 장면이 기억에 없어서). 그러다가 처음 세 식구 단출하게 나가 살게 되었으니 엄마는 오죽이나 좋았을까. 사진 속 세 식구의 얼굴은 저마다 행복하다. 자고 일어나 뻗친 머리를 다스리기 위해 비니 같은 모자를 쓴 젊은 아빠는 인형을 등에 업은 첫딸의 볼에 입을 맞추며 ‘어꾸, 그랬쪄?’라는 표정이다. 집안일을 도와주던 할머니가 봉숭아물을 들여준다며 어르고 꾀어 억지로 할머니 방에서 몇 차례 자고 나니 동생이 생겼다. 주인공이 된 동생 옆 한 귀퉁이에 불쌍하게 앉아 사진을 찍은 것도 화곡동 안방이며, 릿츠 크래커를 상 한쪽에 얹은 동생의 돌상을 차린 곳도 화곡동 마루였다. 동생이 태어나던 해 여름에 산 선풍기는 아직도 여름이면 친정에서 돌고 있다.

동생이 태어나 부산스러워지기 전, 담도 없던 넓은 세상에 나 혼자였을 때였던 것 같다. 실제의 기억과 사진 속 기억의 혼재일 수도 있는데, 두 돌이 지나던 즈음 겨울 마당에서 벽돌을 빻다가 올려다본 하늘. 공항과 가까워 비행기가 자주 다녀서였을까. 인형아기를 업은 꼬맹이 주부가 가사일을 하느라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날 때는 등을 두드리며 하늘을 보아서였을까. 그 하늘의 농도와 높이와 이유를 알 수 없던 슬픔이 기억나는 건 참 묘한 일이다. 낮잠을 자다가 깨었을 때 느끼는 슬픔은 뭉근하고 질펀한 것이었다면, 그 하늘에서 느껴진 슬픔은 아찔하고 탱탱했다.

이후 서울의 동서남북으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 홍익동, 역촌동, 한강을 건너 반포, 방배동. 그리고 결혼 후 한강을 다시 건너 청운동, 부암동, 평창동. 그러다가 또 사정이 생겨 신반포를 찍고 바로 강 건너 강변의 이촌동을 거쳐, 부암동. 그리고는 지금 효자동에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강남에 가서는, “이런 데는 사람이 어디 살아요?”라고 묻는, ‘강북사람’이 다 되었다. 그 사이사이, 아이였을 때, 사춘기였을 때,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 계절 겨울과 상관없이 하늘을 보면 어린 시절 화곡동에서 본 하늘이 생각날 때가 있다. 쨍한 여름 아이들의 함성과 물소리 가득한 수영장 탈의실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여고 시절 가을운동회를 가느라 가뿐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을 때, 평창동 살던 때 집 아래 카페에 앉아서 창공을 올려다 보았을 때, 그리고 추석을 앞둔 즈음의 알싸한 공기 속에서도, 나는 기시감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그 어린 날의 슬픔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은 흑인영가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의 가사처럼 ‘엄마 없는 아이’가 되어버린 듯한 적막감과 비슷한 감정이다. 가끔 다리가 휘청거리기까지 하는 그럴 때 난 거의 ‘아, 그날의 하늘이야’라며, 하늘에 도장을 찍어버린다. 소아과에서 예방주사 맞듯 인생의 어쩔 도리 없는 비애를 하늘의 기억으로 치유하려는 걸까. 삶은 그런 거야, 다 누구든 어느 정도 아프고 힘든 거야, 혼자 견뎌내야 하는 거야, 라고 자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두 돌이면 한창 예방주사 맞을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예방주사를 맞아도 앓을 것은 앓고 지나가듯이 많은 아픈 경험들을 지났다. 나도 그만큼 남들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삶은 그저 안온한 소꿉장난이 아니란 것을 엄중하게 내려다보던 하늘은 내게 말해 주었다. 산다는 건 하나씩 이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발에 신은 신발을 잃고, 엄마를 잃듯이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기도 하다고, 어릴 적 나의 동네여, 당신은 그걸 내게 말해 준 것이리라.

사람 사는 마을이여, 우리를 품고 있는 동네여. 누구나 엄마를 잃는 우리를, 내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당신들 품에 깊이 뿌리 내려 살 수 있게 좀 도와주시오. 꼭 새 길을 내는 것만이, 새 길을 걷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겠나이다. 가끔 고개 들어 하늘을 보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