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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산의 펭귄' - 2016년 11월 12일자 텍사스 중앙일보 에세이

얼음산의 펭귄

2016년이 한 달을 조금 넘게 남았다. 미국에 온 지 벌써 햇수로 사 년 되었다. 시간은 벌써 사 년인데 이뤄놓은 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더디게 간다. 
또한 세월은 하 수상하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뭔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게 있다면 내가 쥔 하루하루, 이 순간이겠지. 그 순간들이 모여 한 해를 이뤄간다.
올 한 해 내게 가장 길게 느껴졌던 순간은 바로 지난주 초등학교 교실에서의 인턴 수업이었다. 

“Thank you for coming to my lesson.”
이 한마디를 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십 분이 지나가 있었다. 오십 분이 이토록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휴-.” 한숨을 돌리면서 정신을 차리니 등줄기에 땀이 그제야 느껴졌다. 
오십 분 동안 나는 여섯 명의 2학년 아이들에게 여러 방법으로 시퀀스(Sequence)에 대해 가르쳤다. 내 인턴십 과제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였기에, 그 전날 집에서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 지 정리하고 연습했다. 꼼꼼하면서도 열정이 가득한 교수님 덕분에 숙제도 많고, 수업에 반드시 넣어야 할 것들도 많다. 혼자 연습을 할 때는 20분이면 가능했다. 그러나 막상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을 하니 말 그대로 이론과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아이들은 정말 말을 안 듣는다. 초등학생이던 이십 년 전 한국에서, 난 정말로 조용하고 말 잘 듣는 학생이 아니었을까? 그런 착각을 하면서 아이들을 바라본다. 길들지 않은 야생 망아지 같은 엘리자베스는 수업 내내 입을 다물 줄 모른다. 2학년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동급 학생들을 뒷골 당기게 한다. 
예컨대, “나는 너보다 덧셈을 잘해. 너 3학년 맞아?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이렇게 하는 거라고!” 인턴 교사인 내 말은 귓등에도 들리지 않는지, 내가 내 준 과제를 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는 옆에 있는 남자아이 저스틴과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 어이 없기도 하지만, 내가 해야 할 것은 ‘쉬!’ 하면서 조용히 분위기를 집중시키고, 준비해 온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교실 경험이 많지 않은 인턴 교사에겐 말 그대로 등에 땀나는 순간이다. 나는 그 오십 분을 오십 년처럼 버티고 또 버텼다. 
때론 열심히 설명하기도 했고, 어느 순간에는 말을 듣지 않는 애들의 모습에 어이 없어 혼자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또 어느 짧은 순간엔 ‘아, 내가 이걸 하러 미국에 왔던가’ 하는 찰나의 후회도 몰려왔다. 아이들이 떠들수록 내 안의 생각은 파도가 되고, 폭풍이 오면서 소용돌이 치는 것이다. 그래도 내 목표는 이 수업을 제대로 시작하고 끝내는 일이다.

인턴십은 오후 3시, 아이들의 하교 시간에 끝난다. 그전에 가도 되지만, 나의 멘토 선생과 짧게라도 대화하는 게 도움이 되기에 나는 늘 아이들과 나의 멘토 선생이 헤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어찌되었든 그녀의 모습은 나의 미래가 아닌가. 나는 평소 수줍고 말 없는 인턴학생인 내 모습에서 빠져나와 대놓고 물어봤다. “어떻게 하면 번 아웃(burn out)되지 않을 수 있나요? 난 그 50분에 진이 빠지는데, 레슬리 당신은 어떻게 버텼나요?” 역시 나는 행운아다. 
나의 첫 멘토 선생은 솔직하고 진솔한 사람이었다. “나 역시 쉽지 않았어요. 내가 교사가 되고 첫해, 정말 나는 매일 밤 집에 와서 울었어요. 부모님한테 전화해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울었죠. 사실 교실 매니지먼트를 어떻게 하는지, 대학에서는 잘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나 역시 애들과 관계 맺는 법, 수업에 집중시키는 법 등을 따로 찾아가서 배웠어요.” 그러면서 콜로라도 학교 시스템에서 교사로서 지녀야 할 테크닉을 직접 찾아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갈 길은 멀어 보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언해 주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이든 쉬운 일은 없다. 지난 4년 동안 미국에서 캐시어 일도 해 보고, 화장실도 청소해 보고, 군인 시험 감독관도 되어 보았고, 한국어도 가르쳐 보았다. 미국에서 나의 구직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래도 그나마 나의 적성과 가까운 일에 가까이 있음을 감사히 여기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내 핸드폰 바탕화면에는 펭귄 한 마리가 열심히 얼음산을 깎고 있다. 데이케어 센터에서 책 읽어주기 자원봉사를 할 때 발견한 어린이 책 표지이다. 펭귄은 오늘도 얼음 산을 깎는다. 그것이 4년차 미국 이민자의 자세다.


신문 기사 링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4760334